고사성어를 찾아서
'판도라의 상자'와 복마전(伏魔殿)
이준석(李浚碩) 국립국어연구원
ㅁ 판도라의 상자
요즘 우리 주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고사 성어로 '판도라(Pandora)의 상자'가 있다.
'판도라의 상자'는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한 것으로 인류의 모든 악과 재앙을 담은 상자라는 상징적 의미를 띠며, 비리나 부정, 음모를 가리킬 때 사용한다.
'판도라'는 제우스가 만든 인류 최초의 여성이다. 이 이름에는 '모든 선물을 받은 여인'이라는 뜻이 있는데,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는 아름다움을, 아테나는 방직 기술을, 헤르메스는 말솜씨 등을 선사하였기 때문이다. 제우스는 이 여인에게 상자를 하나 주면서 절대로 열어 보지 말라고 경고하였으나 호기심 많은 판도라는 상자를 열어 보고야 말았다. 상자를 여는 순간 상자 속에서 온갖 악(惡)이 쏟아져 나왔지만 놀란 판도라가 황급히 뚜껑을 닫는 바람에 희망만은 빠져 나오지 못하였다. 이때부터 인류는 슬픔과 질병, 가난과 전쟁, 증오와 시기 등의 온갖 악으로 시달리게 되었으나 그래도 희망만은 간직하게 되었다 한다. 이의 용례를 살펴보면 대개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다'나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다'처럼 쓰이지만 '판도라의 상자'만으로 쓰이기도 한다.
(1) 풍요와 무병장수를 약속하는 바이오테크 혁명은 또 한편으로는 인류를 파멸로 이끄는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 놓은 결과를 낳고 있다. <주간한국, 2002. 7. 29.>
(2) 한국산(産) '판도라의 상자'가 열린 것인가. 온갖 음모와 비리, 암투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고 있다. <한국일보/데스크 칼럼, 2002. 5. 9.>
(3) 부동산 투기라는 판도라의 상자가 다시 열리게 해서는 안 된다. <한국일보, 2002. 1. 9.>
(4) 질병과 불임의 고통을 덜기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라 강변하지만 복제 인간의 출현은 종국에 인간의 탐욕과 합쳐 판도라의 상자가 되고 말 것이다. <한국일보, 2002. 7. 24.>
(5) 판도라의 상자, 민법 제781조 제1항이다. 호주제'라는 말로 압축되는 이 간략한 명제의 이면에는 어떤 것들이 깔려 있을까. <주간한국, 2002. 2. 27.>
(6) 정치권과 해당 부처 간 첨예한 이해관계 대립으로 '판도라의 상자'를 방불케 했던 판교 신도시 개발 계획이 3개월간의 진통을 겪은 끝에 최종 결론이 났다. <한국일보, 2001. 9. 28>
ㅁ 복마전(伏魔殿)
'판도라의 상자'와 비슷하게 비리나 음모를 가리킬 때 쓰이는 고사 성어가 '복마전(伏魔殿)'이다.
복마전은 '마귀가 숨어 있는 전각(殿閣)이라는 뜻으로, 나쁜 일이나 음모가 끊임없이 행해지고 있는 악의 근거지'라는 말이다. 출전은 "수호지(水滸誌)"의 첫머리에 양산박의 도둑들을 설명하면서 나오는 이야기이다. 북송(北宋) 인종(仁宗) 때에 온 나라에 전염병이 돌자 전염병을 물리쳐 달라는 기도를 부탁하러 신주(信州)의 용호산(龍虎山)에 은거하고 있는 장진인(張眞人)에게 홍신(洪信)을 보냈는데, 용호산에 도착한 홍신은 장진인이 외출한 사이 이곳저곳을 구경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복마지전(伏魔之殿)'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는 전각을 보았고, 호기심이 발동한 홍신은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문을 열고 석비(石碑)를 들추게 되었다. 그러자 안에 갇혀 있던 마왕 108명이 뛰쳐나왔다는 것이다.
(7) '복마전' 연예 기획사 무엇이 문제인가 <한국일보, 2002. 7. 30.>
(8) 복마전(伏魔殿) 같은 미 기업, 금융 회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무도 점칠 수 없음이 이번 월드컴 사태를 통해 보다 명확해졌다. <서울경제, 2002. 6. 28.>
(9) '복마전' 오명을 씻기 위해 민선 시장으로 나섰고 이제 그 일들을 대충 마무리했으니 떠날 때가 됐다는 말로 거절했다. <서울경제, 2002. 6. 28.>
(10) 피파(FIFA)를 복마전으로 만든 것을 새삼 탓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일보, 2002. 6. 5.>
(11) 당시만 해도 전자 상거래가 초창기였고 또 복마전 같은 도서 유통 시장의 에이비시(ABC)도 모르던 10여 명의 젊은 직원들과 서점을 차렸기에 주위에선 "저들이 과연 책이란 걸 알기는 하는 걸까."라는 의구심을 보이기도 했다. <주간한국, 2002. 5. 3.>
(12) '신만이 그 흐름을 아는 곳'이라고 일컬어지는 국제 금융 시장, 이 복마전에서 소로스의 말 한마디는 '신의 계시'에 버금가는 위력을 갖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일보/사람들, 1997. 10. 8.>
ㅁ 비교
용례를 자세히 살펴보면 '판도라의 상자'나 '복마전'은 비슷한 의미로 쓰이지만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판도라의 상자'는 하나의 사건이나 비리로 인해 다른 비리가 일파만파(一波萬波)로 드러나거나 다른 비리를 불러올 때 그 단초가 될 사건이나 비리를 가리킬 때 사용된다. 그러나 '복마전'은 어떤 비리나 부정이 집단적이고 조직적일 때 또는 그러한 비리나 부정이 저질러진 과정을 가리킬 때 쓰인다. 이러한 의미의 차이는 어디에서 기인하는 걸까? 이는 '판도라의 상자'가 한 여인의 호기심으로 상자를 열게 되었고, 그 결과 인류가 고통을 겪게 되었다는 줄거리인 데 반해 '복마전'은 108명의 마왕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양산박 도둑들의 이야기와 관련이 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 출처 : http://www.korean.go.kr/nkview/nknews/200209/50_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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